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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신변잡기

[자유 5] 사이비 예술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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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예술충: 음악의 미적 가치와 영적 가치

pseudo artist: Music - Aesthetic value and spiritual value

似而非 藝術蟲: 音樂-美的値値, 靈的價値

I. 들어가며: 음악관이 바뀌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나한테 중요한 음악의 가치는 미(美)보단 영(靈)인 것 같다. 꽤 급격하게 가치관이 변한 셈이다.

II. 여러가지 음악관

음계에 대해 설명하던 나의 강의

1. 이성적 측면

예전의 나는 음악을 들을 때 순수한 소리 구조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여러 음이 모여서 만드는 조화로운 화음들, 거기서 나오는 음의 구성이 만드는 아름다움 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러 음악 관련 학문 중에서 화성학을 우선으로 강조하며 파고 들며 탐구했다. 부수적인 얘기지만 당시 내 수입의 대부분도 화성학 과외 수입이 차지했다.

느 순간이 되니 음악이 아니라 수학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얼핏 보기에 음악은 감성으로 이뤄진 것 같지만 이면엔 치밀하게 계산된 화성 진행 있다는 이야긴 맞는 얘기다. 문제는 음악은 감성으로만 이뤄진 것도 아니지만 이성으로만 이뤄진 것 또한 아니다. 두 측면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난 지나치게 음악의 논리적 측면만 강조한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다. 군악대 복무 시절엔 연습 보단 분석적 접근에 치중했던 내게 '왜 넌 음악이 아니라 음학을 하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 시절 나에겐 소리로 만든 논리적 짜임새가 음악이었다.

2. 비이성적 측면

그러던 내가 센티멘탈 해진 걸까? 음악을 들으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경을 종종 느끼곤 했다.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다른 세계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일상과 현실에서 잠시 떠나서 '이세계'로 가는 도구가 음악이 되어버렸다.

2-1. 종교음악

괜히 역사적으로 종교 의식에서 음악을 자주 쓰는 게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귀의, 미사 통상문 같이 의례 절차에서 노래를 사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악기로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음악이 아니더라도 염불을 읊고, 미사 기도문을 낭송할 땐 일상 언어와는 다르게 음악적으로 읊조리지 않던가?

그렇다면 내가 종교가 생겨 종교와의 관련성 속에서 음악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갖게 된 걸까? 그런 것 같진 않다. 난 여전히 특별한 종교를 믿지 않고 가끔 교회 설교나 무속 신앙에 기반한 설화에 가벼운 흥미만 있을 뿐이다. 물론 모태 신앙이 아닌 이상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도 처음엔 나처럼 가볍게 관심을 가졌다가 시나브로 신도가 되어가기에 나도 점진적으로 종교적 믿음이 생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애매모호한 이세계

2-2. 낭만주의

그러면 음악에서 미(美)가 아니라 영(靈)의 가치를 찾는 지금의 모습을 설명할 다른 대안은 없을까? 있다. 다만 이 설명은 음악의 논리적 측면에 집중하던 시기와 겉으론 다르게 보이지만 속으론 공통점을 가진 것을 전제한다. 일단 이 설명은 내가 '치밀한 수학적 화성 진행이 음악 미를 만든다고 보는 시절'처럼 음악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수단으론 보진 않는다는 점에서 강한 공통점을 가진다.

앞서 얘기했던 종교 의식과의 관련 속에서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가설과는 이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종교 의식에서의 음악은 신앙의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순 없으니까 말이다.

여하간 이 두 번째 가설은 음악은 그 자체로 자율적이고, 음악이 만드는 세계 자체가 일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라고 보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좋아할 법한 주장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언어로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이 오히려 그 본질을 파괴하는 것으로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이 내가 생긴 것 아니냐는 것이다. 직접 느껴봐야만 알 수 있는 이 느낌, 음악을 들을 때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오직 환상과 꿈만이 남는 것이 아니던가? 어즈버.....

III. 맺으며: 음악관이 바뀌었으나 정확히 어떤 시각인가는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현재 난 지금은 음악에서 이성적 측면보단 비이성적인 면에 눈이 간다. 이게 종교 음악적 관점인지, 낭만주의 관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낭만주의로 내 시각이 바뀌었다면 꽤나 이질적으로 변한 것 같지만 음악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사실 논리적인 면에 집중했던 시절의 사상과 연속성이 있다.

종교음악 관점으로 변화한 것이면 음악을 순수한 감상의 대상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걸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인 가치관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세로보단 가로 방향으로의 변화가 훨씬 radical한 것 같다.

IV. 덧붙이며: 장난 삼아 붙여 보는 멸칭

이러나 저러나 음악 뽕에 취한다. 장난 삼아 멸칭을 붙여보자면 낭만주의는 '예술충', 종교음악은 '사이비'인데 둘을 합치면 '사이비 예술충'이다. 그런데 왜 이들에게 멸칭이 붙는 게 자연스럽게 되었을까?

흔히 예술에 사회적 기능이 다양하다고 말하며 단결, 교육, 여흥 등을 들곤 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실용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예술인데 꼭 모든 예술이 그렇지 만은 않다. 가끔은 예술인들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예술을 전개하며 과연 이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많다. 특히 전위예술이 그러한 경우가 많다.

무언갈 파괴하고, 급진적이고, 난해하며, 무의미한 퍼포먼스로 읽히는 이러한 예술이 '대학 학제, 공공예술기금'의 지원을 받는 데에 대해 제도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술인을 특별히 보호하고 대우하는 거 아니냐는 반론이 제시되기도 한다.

나도 일정 부분 공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변을 해보자면 이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인습타파' 기능 때문에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전 사회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생활양식에 대해 의도적으로 균열을 내면서 반성적으로 현재를 살펴보도록 성찰을 촉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전위예술을 비롯한 수 많은 소위 순수예술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건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론 역사와 인류 문화 그리고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일반론적인 이야기고, 모든 '인습타파'적 예술이 사회에 바람직한 영향을 기여할까에 대해선 나도 의문이 있다.

특별히 아무리 생각해봐도 '반사회적'인 행위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악용될 소지도 상당히 있기 때문이다.

'인습'이란 "이전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낡은 사회 풍습"라는 뜻인데 그 자체론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이 들어있는 말은 아니며 따라서 모든 인습이 무조건적인 타파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한 사회 내에서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를 파괴하며 인류 문화의 풍요로움을 저해하는 데에 예술이 오용될 수도 있다고 본다.

현재의 문명, 문화를 파괴하며 삶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 하에 사회 내에서 순조롭게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과 거리가 먼 예술 가운데 특히 낭만적, 공상적, 전위적, 인습해방적 면모를 보이는 데에 '예술충'이라고 부르는 듯하며, 종교에선 '사이비'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멸칭은 낭만주의 예술, 더 나아가선 순수 예술 일반에 대해 여러 가치판단의 여지를 봉쇄하고 편협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개념어라고 보기에 사용을 지양하였으면 한다.

한편 예술인 스스로도 진정으로 자신이 행하는 전위적 예술이 인류 문명에 바람직한 기여를 한다는 인식이 있다면 역사, 사회, 문명와 같은 거대한 추상적 개념에 사로잡힌 채 사명감, 엘리트 의식을 가지는 것에서 벗어나 설득력 있게 오늘날의 관객에게 자신의 예술을 전개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수단으로 봄 -사회-
음악을 목적으로 봄 -미-
이성적인 면(理, logos)
(교양교육 등)
순수한 소리 구조의 논리
비이성적인 면(여기선 영적인 면에 한정)
종교 음악(의식음악, 포교음악)
낭만주의(음악 자체를 현상적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세계로 봄)

참고문헌

이해완. 불온한 것들의 미학. 경기도:21세기북스(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서울: 사회평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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