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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고려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글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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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걸 좋아한다. 머릿속에 떠돌던 복잡한 정보들이 한 큐에 정리되기 때문이다. 글을 단순히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공유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에 동의할 때, 혹은 글을 통해서 타인도 내 생각으로 말미암아 더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낼 때 뿌듯함을 느낀다.

내가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면 그 자체로 예술이라는 관점이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장이라고 할지라도 우선 뭐라도 써낸다면 표현한 그 자체가 예술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극단적인 생산자, 그리고 작품 중심주의 내지는 수용자를 배제하는 관점이랄까. 물론 나도 작품과 생산자를 중요시하지만, 수용자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이런 미학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제 아무리 소신 있는 예술인이라 할지라도 그와 그 작품을 읽는 관객이나 수용자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사실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다. 나는 솔직히 얘기하자면 대단히 수용자들을 의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 글을 조금이라도 더 쉽고, 제대로 이해하길 희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으면 좋겠는 게 어이없을 정도로 솔직한 심경이다. 나는 글을 쓰는데 생각나는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기술하면서 정제된 구조화된 글을 쓸 때 사용하는 굳이 이 표현 저 표현 어떻게 넣을까 고민하면서 쓰는 힘과 에너지와 시간을 덜 들이고, 사람들은 내 글을 읽는데 더 많은 보존 자원 투자해서 내 아이디어를 선해한다면 솔직히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산자는 비교적 힘을 덜 들여서 글을 써도 찰떡같이 독자들이 글을 이해하거나 그래야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학점이 달려 있는 수업에서 대학 교수의 글이라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혹은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권력이 있는 사람은 텍스트를 읽을 때야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정말 순수한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재미, 아름다움, 선함, 논리성의 매력으로 독자를 매료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제도와 문명의 보호막 없이 맨몸으로 무기 하나만 들고 싸워야 하는 야생 그대로의 상태에서 순수한 내 피지컬로 싸워야 하는 사람의 인생이다.

물론 나도 보호막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보면 내가 순수한 텍스트의 피지컬로 수용자들에게 전달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이없어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유튜브와 SNS 등지에서 얼굴을 팔아먹고, 또 예술,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이라는 비록 학부생의 신분이지만 제도권의 보호를 받고 있다.

또 주 독자를 같은 학과 학우들 대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연 너가 너의 기행으로 인한 유명세가 없었더라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있었겠냐고, 너는 음악성이 아닌 기믹으로 승부하는 뮤지션 같은 셈이라고 멸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19세기적 의미의 관조적인 예술이라는 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지라고 웃으며 반박하고 싶다. 실제 수용자들은 작품보다는 그 생산자를 더 좋아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의 손길을, 그리고 인간성을 그리워하고 애착한다는 그리하여 아무리 잘 짜여진 수리 논리적 완결성을 가진 형식미를 갖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생산자의 손길이, 마음이, 감정이 간접적으로나마 안 느껴진다면 기피감이 든다는 것.

잘 생각해 보면 그리고 당신들이 그토록 예찬했던 수많은 시인, 소설과 문인들 역시도 물론 생전을 인정받지 못한 이 고독하게 살아간 소신 있는 아티스트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와 소사이어티를 이루면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 그리고 어쩌면 나보다도 훨씬 더 폐쇄적인 그들만의 공간에서 밀어주고 끌어주었다는 점,  인터레스티드한 즉 외부 이해관계와 결부시켜서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이유로 나를 비난하기에는 대단히 부적절해 보인다.

차라리 내 텍스트에 미적 완성도를 올리라고 채찍질을 하는 게 더 생산적이고 고마울지도 모른다.

요즘 내가 쓰는 글쓰기 전략은 서사적인 글쓰기이다. 나는 원래 대단히 이론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때의 이론이나 대개는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즉 "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면"이라는 전제하에서 기술된다. 이때의 '다른 모든 조건' 중에는 시간의 흐름 역시도 포함하는, 그래서 무시간적인 공시적인, 즉 시간을 정지시킨 채 단면을 자르고 그 일면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히 기술하는 식이다.

예컨대 음악에 대해서 논의할 때도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시간예술'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적 흐름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고 그것이 마치 직관적으로 단번에 처음부터 끝을 한 큐에 직관적으로 읽을 수 있는 그림인양 대하는 태도를 가진다. 리듬, 박자가 만드는 시간성은 무시한 채 관습화된 화성, 형식 등 그것의 환원화된 구조에만 집중한 셈이다.

그냥 아주 쉽게 얘기하면 (역사주의적 접근을 제외한) 비문학적인 글을 많이 썼다는 얘기다. 이런 비문학적 글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읽었다. 특히 정교하게 이론적으로 구조화된 그리고 치밀하고도 엄밀한 논리로 전개된 글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걸로 인해서 아름다움을 그다지도 못 느끼나 보다.

무엇보다 잘 읽지 않았다. 아무리 맞고 옳은 얘기라고 할지라도 대단히 지루해 했다.

사실 어쩌면 아무리 옳은 얘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재미가 없으면 훈개쪼니 계몽쪼니 하는 얘기에 반발한다. 이는 재미만을 추구하는 세태에 의거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글이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걸 싫어한다. 그 글에 공백과 빈틈과 해석의 여지가 있는 걸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래서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지 싶다가도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저런 얘기를 하는 걸까 고민을 하며 조금씩 이해가 되고, 또 너무 쉬운 얘기를 하는 거 갔다가도 살짝 어려운 얘기를 하다가 다시 쉬워지는 등 완급 조절이 있으며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글을 대단히 선호한다.

그리고 그 글에서 나온 얘기가 남의 얘기 같지 않을 때, 마치 내가 사는 삶의 얘기와 같은 기분이 들 때 동일시하고 이입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비문학적인 글 대신 다른 글을 적기로 결심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서사적인 글쓰기다.

그렇다면 너는 이론적인 논리적으로 구조화된 글쓰기의 방식을 포기한 거냐라고 물어볼 수 있다. 허구적인 글을 쓸 거냐고. 엄밀성과 치밀성을 포기할 것이냐고.

멍청한 반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옳음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것이다. 내가 서술 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지식 전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서사를 통해서도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물론 더 정확히 얘기해 보자면 지혜화된 지식인 셈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담과 설화가 그냥 민간에서 떠도는 시시콜콜한 잡설로 치부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왜 그 글 속에서 옛 사람들의 고민과 욕망과 좌절, 찬양, 비하 등을 읽을 수 있는 걸까?

물론 거기서 읽어낼 수 있는 옛 사람들의 통찰이라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을 엄밀하지 않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텍스트란 그렇게 다양한 해석의 레이어가 겹쳐 있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서사란 인간 삶을 경험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야기화했을 때 수용자들이 훨씬 더 잘 받아들인다.

그래서 대내적으로 내가 어떤 정보나 지식을 정리할 때는 소위 비문학적인 방식의 글쓰기를 할 것이지만, 대외적으로 다른 광범위한 독자를 타깃으로 하는 글을 쓸 때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녹여낼 것이다.

이야기의 방식으로 지식을 전달한다고 해서 그것을 크게 왜곡하거나 과장 변형, 그래서 변질된다는 우려 또 있지만, 그리고 그 우려에 아예 타당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최대한 그 지식의 요와 본질을 변질시키지 않은 채로 잘 전달시켜 보려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스스로 너무 엘리티즘에 빠진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고, 네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겠냐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 비난을 감수하고 얘기를 해보자면 왜 옛 사람들이 지식과 지혜를 전달할 때 이야기의 형태로 얘기했는지 새삼 알 것 같다.

그렇게 비문학으로 적힌 텍스트는 사람들이 정말로 싫어한다. 머리 아파하고 지루해 한다.

성경이 왜 이야기의 형태로 되어 있는가? 왜 고대 서사시는 항상 교훈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가? 물론 이건 엘리티즘적인 관점으로만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민간에서 기층민에 의해서 전수되어진 여러 이야기, 민담 설화 역시도 삶의 지혜와 지식을 서사의 형태로 전달해 온 문화적 유산이다. 이쯤 되면 나는 예술이 아니라 프로파간다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쯤 되면 사상 주입의 수단으로 그냥 '예쁜' 문체로 너의 이념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겠다는 거 아니냐? 네 글을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술술 그를 독해해 나가는 사람들이 그 텍스트 이면에 숨겨져 있는 너의 이데올로기에 스며드는 것을 조장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부정 못하겠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없는 사람이 뭐 어디 있겠으며 또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 어디 있겠느냐. 또 네가 말하는 순수 예술이라는 것 역시도 유미주의 이데올로기고 자연을 예찬하는 시 그리하여 가치 중립적이라고 생각해서 공교육 음악 시간에 동요 노랫말에 쓰이는 그 시도 사실은 자연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텍스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실은 예술 텍스트를 생산하는 사람 스스로가 안다. 솔직한 자기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무언가에 대해서 기술한 건지, 아니면 외부에 무언가를 주입시키기 위해서 만든 텍스트인지 스스로는 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말하는 대로 글을 썼는데 현실 세계에서 정치적인 의도가 부여되고 그렇게 읽히는 것까지는 내가 어떻게 막을 수는 없는 셈이다. 그렇게 상징화된 내 글, 그리하여 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는 글 이 있다면 다음 글에서는 그렇게 안 읽히도록 수정해서 그 수용 양상을 고려하고 반영해서 다른 방식으로 글쓰기를 할 수야 있겠지만, 기존의 글을 내가 엎어버리거나 삭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이데올로기 눈치 보면서 내 양심과 표현을 저버리는 것도 그것대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내 글이 예술인지 프로파간다인지 그 애매한 중간 위치에 있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엄청 나도 한국에서 가장 수월성이 있는 예술 영재교육기관에서 몇 년을 학습한 입장이라서 그런지, 그리고 학풍 자체가 대단히 예술 내재적인 접근을 요했던 곳이라서 그런지 실은 나도 순수 예술을 알게 모르게 지향하는 측면도 강하다.

그래서 결론은 예술가로서 여지원 그리고 내가 생산해내는 아티스틱한 텍스트들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나 사기꾼, 사이비 종교인 맞으니까 그냥 좀 속아주고 세뇌되어주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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